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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폭군 황제 네로의 진실 [황제의 진실][서프라이즈]

서기 64년 로마

 

 

로마시는 거대한 불길에 타오르고 있었다. 자기가 불을 지르고 불타 오르는 도시를 보며 여유롭게 시를 읊는 한남자! 그는 바로 로마의 폭군

네로황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37.12.15 ~ 68.6.9]였다.

 

 

네로황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37.12.15 ~ 68.6.9]

 

그런데 

 

1981년 독일의 작가 '반덴베르크[Philipp Vandenberg]'는 로마 대화재 [Great Fire of Rome]가 왜곡 되었다고 주장했다.

 

서기 64년 7월 18일

로마 외각에 한 기름창고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은 강한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로마전역에 퍼져나갔다. 무려 일주일 간이나 계속되었던 불길은 로마시 3분의2이상을 잿더미를 만들었고 로마의 14개 행정구역중 화재 피해를 보지않은 곳은 고작 4개에 불구할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되어있는 "로마 대화재" 이 모든것은 로마의 미치광이 황제 네로 때문에 발생된것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네로 광기와 고족의 황제 '반덴베르크'

 

그러던 1981년 독일 "네로 광기와 고족의 황제" 출판 기념작가 인터뷰에서 독일의 유명작가 '반덴베르크' 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로마 대화재와 네로 황제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었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그 근거로 타키투스 연대기에 기록되어있는 로마 대화재에 대한 내용을 들었다.

 

타키투스[Tacitus] 연대기란?

네로황제의 황제시절 활동한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황제의 일상과 주요 사건들을 상세히 기록한 책으로써 많은 역사서중 가장 사실적으로 기술한 책이라 평가 받고 있다.

 

그책에는 로마대화재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있는데

 

첫째

로마에서 처음 화재가 발생할당시 네로는 로마가 아닌 로마에서 80km떨어진 고향 안티움에 있는 별장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화재의 소식을 듣자마자 네로는 화재를 수습하기위해 곧바로 로마로 달려왔고 화재의 진압을 진두 지휘하였다.

 

둘째

화재로 인해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광장과 건물들을 개방해 피난처를 제공햇고 창고에 비축되어있던 식량을 방출해 곡물가격을 안정시켰다고 기록되어있다.

 

뿐만아니라 역사속 그어디에도 네로가 불을 지르고 노래를 햇다는 기록은 없으며 오히려 네로는 대화재를 통해 불타버린 도시를 보며 매우 비통해 했다고 한다.

 

 

그럼 만약 네로가 불을 질렀을 가능성은 없는가?  '반덴베르크'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일 풍문대로 네로가 새로운 로마를 재건하기위해 불을지른 거라면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디고 한다.

 

첫째

로마 대화재로 불탄 막시무스 경기장은 자신의승전을 기념하기위해 지은것으로 네로가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 건축물이었기에 피했을것이다.

 

둘째

황제 궁전과 함께 불타버린 수많은 로마 미술품과 그리스 예술품들역시 네로가 평소 애착을 가졌던 만큼 좋아하던 것들이다. 사전에 방화를 계획 했다면 안전한 곳에 옮긴후 불을 질렀을것이다.

 

무엇보다 대화재이후 도시가 재건될때 네로가 가장 우선시 한것이 바로 수로 시설이었다. 당시 로마는 크고 작은 화재가 잇따랐는데 네로는 좁고 복잡한 골목길 때문에 화재진압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로는 대화재이후 불을 쉽게 진압할수 있도록 건축방식을 바꾸었고 새로 재건된 도시에는 화재 진압용 수로를 늘리는 공사를 추진 했다. 실제로 네로는 대화재로 인해 불타버린 도시를 안타까워 했고 다시는 그와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작가  '반덴베르크'는 이런점들을 들어서 로마 대화재의 진실이 왜곡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왜? 네로는 지금껏 미치광이 황제에 대와재의 방화범으로 알려져있었나?

 

 

세르비우스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 BC 3 ? ~ AD 69]

 

갈바와 원로회 때문이었다. 세르비우스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 BC 3 ? ~ AD 69] 는 로마의 제 6대황제로 네로를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인물이었다. 네로가 5대황제에 오르던 직후부터 원로회를 견제하고 문화정책과, 친서민 정책을 펼치자 갈바를 비롯한 원로회는 네로를 못마땅해 했다. 그러던중 네로가 속주세를 폐지하자 양측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속주세

당시 로마의 속국 시민들에게 부여되는 세금

 

네로가 속주세를 폐지하면서 기득권의 이득을 제한하자 갈바를 중심으로한 원로회와의 사이도 급격히 악화됐다. 그들은 호시탐탐 네로를 제거하기위해 기회를 노렸지만 황제를 몰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비록 네로는 자신의 황권에 대항하는 자는 그게 어머니든 아내든 무자비하게 죽여버린 폭군이었지만 여러정책을 통해 서민들로 부터는 상당한 지지를 받고있는 황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갈바와 원로회라고 해도 민심을 무시할수 없었기때문에 쉽사리 행동을 할수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던중 로마에 대화재가 일어났고 화재의 피해에 민심이 악화되자 그들은 이것을 기회로 삼게 된다. 원로회는 네로가 불타는 로마 시내를 바라보며 흥에 겨워 악기를 연주하고 시를 읆었다는 소문을 퍼트렸고 네로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위해 로마를 일부로 불태웠다는 소문까지 퍼트렸다.

 

 

Great Fire of Rome

 

실제로 로마대화재 직후 황폐한 도시에 새로운 건물들이 속속 건설되었고 재건된 로마 시가지의 모습이 대화재 이전보다 한층더 거대하고 아름답게 변하자 로마 시민들은 소문을 믿게 되었고 미친황제가 불을 냈다고 생각하며 민심이 돌아서게 된것이다. 결국 반역죄로 몰린 네로는 반란군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이집트로 탈출을 도모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사상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된 "로마 대화재" 그리고 그로인해 오랜 세월동안 오해와 비난을 받았던 미치광이 황제 네로 어쩌면 그에관한 역사는 기록된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