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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미라로 만드는 만병통치약 "무미야"<MUMIA><서프라이즈>

1550년대 유럽!

 

 

모든이들이 열망하는 약이 있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람도 먹기만 하면 단번에 일으켜 세우고 뼈가 부러졌을 때도 바르기만하면 낫고 심지어 신비의 정력제라 불리며 중세 유럽 최고의 명약으로 만병통치약이라고 명성이 자자했던 약의 이름은 바로 무미야 <MUMIA> 였다.

 

무미야는 가벼운 감기나 두통에 상비약으로 사용되는가하면 화상이나 피부에 난상처에 바르기도 했고 뇌졸증이나 중금속중독등과 같이 심각한 질병에 쓰이기도 했다. 용도에 따라 물약은 물론가루약이나, 연고등 다양하게 만들어 졌으며 다양한 가격대로 무수히 많은 종류의 무미야가 존재했다. 집집마다 거실마다 비상 상비약으로 무미야가 한병씩 놓여있을 정도 였는데 집안에 무미야가 떨어지는 날에는 당장 구하지 않으면 큰일날것처럼 다들 불안해 했다. 집안에 무미야가 떨어지면 아무리 먼곳이라도 달려가서 반드시 구해 놓아야만 마음편히 지낼수 있을정도로 무미야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그런데 1893년 영국의 이집트학자 E.A. Wallis Budge 가 책<Mummy(미라)> 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그안에 이 무미야에 대한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중세 만병통치약으로 불렸던 무미야가 이집트 미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미라를 약으로 썼단 말을듣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라는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왕족이나 귀족의 시신을 오래동안 보존하기위해 특수한 약품으로 처리한 것으로 수천년동안 무덤속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이런 미라를 어떻게 약으로 썼던 것일까?

 

 

무미야 <MUMIA>

 

미라를 만드는 과정에 숨어있었던 비밀

 

 

 

고대 이집트에서는 보통 미라를 만들때 내장을 제거한뒤 붕대로 몸을 단단히 싸매는데 이때 사용하는 분대가 그냥 보통붕대가 아니었다. 이붕대는 몰약성분과 향신료, 희귀한 허브들이 잔뜩들어간 특수한 용액에 오랫동안 담가두었건 것이다. 그런데 붕대의 주요성분이었던 몰약은 이집트근처 아프리카 인근 해역에서만 나는 나무에서 뽑아낸 성분으로 살균, 정화능역이 뛰어나고 성경에서도 아기 예수탄생 시의 동방박사들의 선물로 나온다. 일찌감치 몰약의 효능을 알았던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위해 미라를 만들때 몰약을 많이 사용한것이다. 그런데 이소식이 유렵에 전해지면서 몰약나무가 나지않는 유렵에서는 몰약이 잔뜩 스며든 붕대는 물론 미라의 시신까지 약효가 있을것이라 믿고 약으로 사용하게 된것이다.

 

 

 

사실 미아를 약으로 사용한 기록은 고대 그리스에서도 발견된다.

 

 

 

AD40년!90년 사이 활동한 그리스 약학자이자 의사였던 디오스코리데스 [Dioscorides]에 대한 기록을보면 미가 이미 미라를 치료약으로 썼음을 알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12세기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의사 엘마가르는 구역질, 뇌전증, 발진등 다양한 질병에 미라 가루를 썼는데 효험이 있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다 중세에 접어들면서 무미야에 대한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어 나면서 모든이에게 사랑받는 대중적인 약이 되었던 것이다. 급기야, 무미야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약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실제 몰약보다 미라로 만든 무미야의 약값이 비쌀 정도였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몰약을 먹지 않고 몰약이 스며든 미라를 먹으려 했을까?

 

 

 

 

당시 중세유럽은 이집트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었다. 귀족들은 집을 이집트식으로 장식하는가 하면 파티장 중앙에 미라 한구정도는 놓여있는게 유행일 정도 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몰약 그자체보다 미라가 지닌 영혼불멸의 이미지에 반해 몰약보다 몰약이 수천년간 스며들어 있었던 미라의 약효가 더클거라고 생각하게 된것이다.

 

이렇듯 무미야가 고가로 팔려 나가고 인기가 높아질수록 더많은 이집트 미라가 필요 했다. 해마다 수백톤에 달하는 이집트 미라를 수입했음에도 수요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여기저기서 미라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심지어 미라를 유통해주는 전문 브로커들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미라는 늘부족했고 전문브로커들의 고민은 점점 더 깊어갔다. 급기야 이집트로 도굴단을 보내 미라를 도굴하는가하면 밀매까지 하는등 미라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경이었다.

 

결국 브로커들은 이집트와 가까운곳에 몰약나무가 자라면 미라풍습이 있을거라는 생각에 아프리카 인근해안에 있는 테네리페 섬까지 찾아가게 되는데 현지인의 조상들이 묻혀있는 공동묘지 동굴앞 현지인은 신성한 곳이라 들어가면 안된다고 만류했다. 그가 본것은 동굴안을 가득채운 미라들이었다. 이섬은 동굴에 수백 수천구의 미라를 함께 매장하는 풍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섬에 미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미라 발굴단들이 앞다투어 이섬을 찾아 왔다. 16세기 이섬에서는 미라가 있는 동굴들이 5개나 더발견되었는데 동굴마다 천여구도 넘는 미라가 있었다. 미라전문브로커들은 현지인들을 매수 또는 협박해서 수만구의 미라들을 모두 유럽으로보내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결과 지금 이섬에는 미라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Tenerife I. mummy  테네리페섬 미라

 

아프리카 이집트 인금섬들을 모두 뒤져서 미라를 찾아낸 미라브로커들 그럼에도 미라가 더필요했다. 그당시 미라의 공급이 턱없이 부족해지자 브로커들 가이에 비밀리에 행해지는 새로운 수법이 생겨났다. 부랑자나 죄인들의 시신, 병에 걸려죽은 시신들을 마치 이집트 미라인양 속여서 팔아 넘기기까지 했던것이다. 무미야 떄문에 일어난 이런 끔찍한 부작용에 대한 기록은 당시 의사의 기록에서도 찾아볼수 있었다.  

 

1964년 프랑스 명의로 불렸던 의사 라퐁텐은 무미야의 약효에 이상을 느끼고 당시 가장큰 미라거래소를 방문한뒤 다음과 같은 글을남겼다.

 

"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있는 가장큰 미라중개상점을 창아가서 미라를 확인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본것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죄인들과 전염병에 걸린 병자들의 시신으로 미라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사실을 널리알려 더시상 미라가 약으로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의사 라퐁텐이 무미야가 지닌 부작용과 문제점을 널리알렸음에도 그 인기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무미야의 성분과 효능에 대해서 전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럼에도 무미야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300여년간 유럽역사상 가장 오랜기간동안 최고의 약으로 사랑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