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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마루타 731부대의 총책임자 "이시이 시로" 무죄 <나는 무죄로소이다.><서프라이즈>

1947년 일본 도쿄 법정

 

한남자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시이 시로 마루타 실험으로 악명높은 731부대의 총책임자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사형 선고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법정은 A급 전범이었던 이시이 시로에게 무죄를 선고한것이다. 과연그는 어떻게 무죄를 선고 받았던 것일까?

 

1946년 1월 제2차 세계대전 종식후 일본 도쿄에서는 2차세계대전 전범등에 대한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미국의 주도로 시작된 도쿄 재판은 당시 연합국 최고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재판장으로 임명되었고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등의 연합국가 출신의 검사 30명이 재판을 맡아 진행했다.

 

1946년 4월부터 1948년 11월까지 약2년 반에 걸쳐 진행된 이 전범재판을통해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27명의 A급 전범자로 정식 기소 되었고 그중 교수형 7명, 종신형 16명등 전원에세 중형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남자그는 A급 전범들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받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731부대 총 책임자인

죽음의 천사 이시이 시로 였기 떄문이었다.

 

 

 

731부대란?

 

 

731부대

 

2차 세계대전당시 중국 하얼빈에 위치한 일본의 비밀 군부대였는데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화학, 세균전 연구및각종 생체 실험이 자행되던 곳이었다. 예를들면

 

<동상실험>

영하 40도의 날씨에 산채로 옷을 벗겨 밖에 장시간 묶어두거나 얼음물에 들어가게해 몸을 얼게 만들어 관찰함

 

<착혈실험>

대형 원심분리기에 산 사람을 매달아 고속으로 회전시켜 눈, 귀, 코, 입, 항문등으로 피가 나오는 과정을 관찰함

 

심지어 살아있는 상태에서 마취없이 장기를 꺼내보는등 차마 인간으로는 할수없는 극악무도한 짓을 서슴치 않고 해왔던것이다. 이같은 실험에 쓰인 사람들을 일명 마루타<껍질만 벗긴 통나무란뜻>라 불렸고 중국인, 조선인, 몽골인, 러시아인등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약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산채로 실험재료가 되어 죽어갔다. 

 

 

 

그의 만행은 끝이 아니었다. 

 

 

            이시이 시로

 

1938년 731부대 이시이 시로는 세균무기와 독가스탄을 만들어 살포 하기도 했는데 총 1,600 차례에 걸쳐 중국 일대에 살포된 독가스탄으로 인해 중국군과 민간인을 포함해 무려 57만 명의 희생자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런 악랄한 이시이 시로의 재판이 열리자 사람들은 모두 그가 사형을 받을거라 믿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두의 예상을 꺠고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이시이 시로를 살린것은 바로 한통의 전화 였다.  

 

 

 

당시 전범 재판의 총책임자였던 맥아더는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가 받은 전화의 주인공은 미정부 고위관계자의 전화 였고 전화내용은 놀랍게도 이시이 시로를 구하라는것이었다.

 

그렇다면 미정부 고위 관계자는 왜? 이시이 시로를 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일까?

 

그이유는 731부대의 연구 자료때문이었다. 731부대는 장기간 다양한 생체 실험을 통해 수많은 연구 자료와 실험의 노하우들을 축척해왔는데 미국은 이자료들을 손에 넣고 싶어 했던것이다. 731부대의 연구 자료만 얻게 된다면 미국은 세계 의학계를 독점하고 눈부신 의학 발전과 수많은 이익을 꾀할수 있었기 때문이라 믿었기 떄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하자 이시이 시로는 서둘러 모든 연구자료를 소각해버렸고 미국은 원하는 자료들을 얻을수 없었는데 그러던중 미국은 이시이 시로가 자료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국은 몇 차례 심문을 통해 자료를 빼내려고 했지만 이시이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잇따른 재판을 통해 전범들이 줄줄이 사형선고를 받게 되자 위기를 느낌 이시이 히로는 결국 미국의 거래에 응했던 것이다.

 

그러자 미정부 고위 관계자는 그즉시 전범 재판의 총책임자였던 맥아더에게 전화를 했는데 미정부 고위관계자의 명령을 받은 맥아더는 큰고민에 휩싸였다. 이그유는 소련과 중국 때문이었는데 소련은 A급 전범중에서도 가장 극악무도했던 이시이 시로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731부대로 인해 인명 피해가 가장심했던 중국 역시 반대할게 뻔했기 떄문이었다.

 

 

그런데

 

 

무죄선고를 받고 풀려나게된 이시이 시로 과연 어떻게 된것일까? 키낸은 한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는데....그들이 생각해 낸 묘안은 바로 이시이 시로가 트루먼을 고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전쟁의 종식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원자탄을 투하했던 트루먼의 행위를 고발함으로써 이시이 시로의 죄역시 대의를 위한 연구로 몰아갈수있었고 미국은 이를 빌미로 소련과 중국을 설득했던것이다.

 

예상대로 소련과 중국이 반대하며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자 미국은 공개 투표로 상황을 몰아갔는데 투표를 하게 된다면 영국을 비롯해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등의 우방국가로 부터 찬성표를 끌어낼수 있었기 떄문이었다. 투표결과 찬성7표 반대 4표로 투표결과 이시이를 면죄하자는 쪽이 우세했고 결국 맥아더는 공개 투표를 통해 소련과 중국의 반대 의견을 뒤엎고 이시이의 무죄를 이끌어 냈던 것이었다.

 

또한 2005년 미국에서 발견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이시이 시로는 연구자료를 넘기는 조건으로 무죄방면은 물론 현재 시가 4,000만엔에 해당하는 거액과 선물, 향응등을 추가로 제공받은것이 밝혀져 더욱 큰충격을 주고있다.

 

 

 

잔인한 학살을 통해 얻은 연구자료들로 목숨까지 구한 이시이 히로 그는 67살 식도암으로 사망하기까지 단 한번도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고 일본 녹십자 활동을 통해 부와 명예까지 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