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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에피소드 [지독한복수][서프라이즈]

1793년 7월 프랑스 파리

 

분노에 휩싸인 한남자가 누군가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그린 그림은 당시의 정치가 마라가 암살당하는순간을 담은 <마라의죽음>이었다. 그리고 1년후 남자는 실제로 이그림을 이용해 복수에 성공한다.

 

 

자크루이다비드 JACQUES-LOUIS DAVID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기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던 남자는 당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 자크루이다비드JACQUES-LOUIS DAVID 였다. 그는 안정된 구도와 명암의 대비를 바탕으로 인물들을 우아하고 균형감있게 표현하는데 탁월한 화가였는데 특히 프랑스 혁명을 이끈정치가 마라가 괴한에게 암살당한 직후를 그린 <마라의죽음>

은 단순한 구도아래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다비드의 대표작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기위해 마라의 죽음을 그린 다비드 북수의 대상은 바로 산수의 존재를 최초로 증명한 과학자 라부아지에 Antoine Laurent de Lavoisier 였다.

 

 

과학자 라부아지에 Antoine Laurent de Lavoisier와 그의 아내

 

5년전인 1788년 다비드는 라부아지에 집을 방문하게된다.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라부아지에의 아내가 부부의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라부아지에는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인물이라 프랑스 오를레앙의 시의원을 맏아 정치가로 활동중이었다. 다비드는 라부아지에 부부에 그림을 그려주는것을 계기로 라부아지에 주변의 유명인사들을 소개받고자 했다. 라부아지에 아내인 마리와 다비드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둘사이를 오해했고 천한 직업을 가진 주제에 자신의 아내를 넘본다며 다비드에게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다. 당시화가들은 돈을받고 의뢰인들의 그림을 그려주는 존재일뿐 사회적으로는 존경을 받는 직업이 아니었는데 이에 자존심에 큰상처를 입은 다비드는 라부아지에 에게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그러던 5년뒤 1793년 7월 다비드는 장폴마라가 괴한에게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마라는 파리시민을 이끌고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인물로 루이 16세편에 섰던 왕당파를 모두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한 급진 혁명파였다. 루이 16세에의해 오늘날의 재무부장관인 재종총감으로 임명된 라부아지에는 왕당파의 수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마라는 이런 라부아지에를 격렬이 비난하며 그와 사사건건 부딪쳤는데 이후 프랑스 시민 혁명이 성공하면서 1793년 루이 16세가 처형되었지만 그의 오른팔이었던 라부아지에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수있었다. 저명한 과학자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Death of Marat 마라의 죽음

 

 

하지만 마라는 끝까지 라부지에를 단두대에 세워야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런상황에서 마라가 괴한에게 암살당했던 것이었다. 다비드는 이런상황을 이용해 라부아지에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다비드는 그림을 통해 마라를 시민을 위해 온몸을 바쳐 일하다가 안타깝게 죽은 혁명가로 미화시키기로 하는데 이렇게 완성된 그림이 바로 <마라의 죽음>이었다. 마라가 암살당한 직후에 완성한 이그림에서 마라는 목욕을 하고있는 와중에도 오른손에는 펜을 왼손에는 시민들의 청원서를 들고 있는데 이는 그가 죽는 순간까지도 시민들을 위해 일한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다비드는 마라는 시민을 위해 희생한 순교자로 묘사했는데 그의 가슴에 난 상처는 창에찔린 예수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몸을 비튼 각도와 축 늘어진팔 평온한 표정은 예수가 순교하던 순간을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흡사했다. 그리고 그림 오른쪽에는 환한 빛을 그려넣어 싱성하고 경건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Jean Paul Marat 장 폴 마라

사실마라는 심각한 피부질환을 앓고있었고 곱슬머리에 처진눈을 가지고 있어서 추남에 가까웠는데 하지만 다비드는 마라의 얼굴을 희고 깨끗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미소년으로 묘사했다. 다비드는 그림을 완성한 직후 더많은 시민들이 그림을 볼수있도록 파리시내 곳곳에 전시했다. 다비드의 예상대로 시민들은 마라를 자신을 위해 희생한 순교자로 여기며 애도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마라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왕당파 수장 라부아지에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는데 언론 역시 그릴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라부아지에가 과거 세금 징수를 총괄했던 직책을 맏았던 사실이 드러났다.

 

라부아지에를 향한 시민들의 분노는 걷잡을수 없이 커져갔고 결국 라부아지에는 다비드가 <마라의 죽음>을 공개한지 한달만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게된다. 그리고 1년뒤인 1794년 라부아지에는 다비드가 지켜보는 가운데 51세의 나이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과학자 라부아지에를 향한 지독한 복수심으로 <마라의 죽음>을 그린화가 다비드 결국 라부아지에의 목숨을 빼앗은 이그림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비드 최고의 명작으로 평가 받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