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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콜롬버스의 유언 [의문의 무덤][서프라이즈]

스페인 세비아대성당

 

Seville Cathedral 이성당 지하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왕과 교황들이 묻혀있다. 그런데 지하가 아닌 지상1층 성당 한 중앙에 위치한 의문의 무덤하나 도대체 이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스페인 세비아대성당 Seville Cathedral 콜롬버스 무덤

 

세비아대성당 한가운데 위치한 이무덤은 청동으로 만들어 졌는데 높이 3m , 가로 2m , 세로 2.5m 크기의 거대한 무덤이다. 더욱 특이한것은 4명의 사람이 관 하나를 떠받들고 서있는 모습이다.이 관을 떠받들고 있는 4명은 15세기 스페인왕국을 세웠던 4개의 국가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의 왕을 의미한다. 그 무덤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바로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롬버스 [Christopher Columbus] 였다. 그렇다면 콜롬버스의 무덤은 왜이런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진 것일까? 그이유는 콜롬버스의 마지막 유언때문이었는데

 

1940년 스페인왕국

이탈리아 출신의 항해사였던 콜롬버스는 인도로 가는 싱항로를 개척하고 싶어 했고 후원자를 찾고있었다. 그러던중 스페인 왕국의 여왕 이사벨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길은 험란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아라비아 사막을 지나가는 육로 밖에 없었는데 걸어서 가는길은 수개월이 걸렸고 길이 매우 험란해 가는도중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만큼 인도로 가는길은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당시유럽에서는 인도산 향신료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고 유럽의 모든국가들은 그향신료를 차지하기위해 인도로가는 새로운 항로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콜럼버스의 제안대로 새로운 해상 무역로를 개척한다면 인도산 향신료를 쉽게 얻을수 있고 향신료 무역에서 얻은 이익을 바탕으로 스페인이 유럽내 최강국으로 우뚝설수있는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콜롬버스의 제안을 불신하며 후원을 반대했다. 대신들의 격력한 반대에도 여왕은 콜롬버스를 믿고 후원금을 지원했고 드디어 1492년 8월 3일콜럼버스와 90명의 선원을 태운 산타마리아호는 프론테라항에서 첫항해를 했다.

 

하지만 두달가까이 항해를 계속 했지만 인도땅은 보이지 않았고 콜롬버스는 점점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콜롬버스는 자신이 계획한대로 항해가 이루어지지않는다는 사실을 내색할수 없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킬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었다. 콜롬버스는 항해일지 날자를 줄여서 쓰거나 항로를 거짓으로 기대하며 마치 정상적인 항해가 이루어지는것처럼 선원들을 속였다. 그것이 가능했던것은 선원들에게 술을먹여 밤낮없이 골아떨어지게 만들거나 어떤날은 아예 갑판으로 올라오지 못하게막아 날짜가 바뀌는것을 알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었다. 콜롬버스는 그렇게 하루하루 위기를 모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항해시작 70일만에 드디어 섬하나를 발견하게된다. 섬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그곳이 서인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이곳이 자신이 알던 인도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실 콜롬버스가 도착한곳은 인도가 아니라 중앙 아메리카 바하마제도 였다. 하지만 이곳이 인도가 아니라는 확신을 하게된 콜럼버스는 항해전 여왕과의 약속때문에 빈손으로는 돌아갈수 없었다. 할수없이 콜롬버스는 담배와 고구마, 야자, 마 등 유럽에는 없는 이지역의 토산물들을 챙겨 항해 7개월만에 스페인으로 돌아온다. 콜롬버스는 대신들에게 의심을 받았지만 이사벨 여왕의 신임덕분에 위기를 모면했고 심지어 여왕으로 부터 신항로 개척의 공로를 인정받아 제독의 지위까지 수여받았다.

 

이듬해인 1943년 콜롬버스는 이사벨 여왕의 지원으로 두 번째 항해를 떠났는데 선박 17척에 선원 1500여명을 태운 대선단이었다. 콜롬버스는 첫항해 실패로 인도가 좀더 아래쪽에 있을거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항로를 좀더 남쪽으로 해서 항해 두달만에 또다른 섬을 발견한다. 콜롬버스는 이번에야 말로 인도땅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콜롬버스의 확신은 의심으로 변했다. 이때 원주민들의 금붙이가 눈에 들어온 콜롬버스. 콜롬버스는 섬에 머무는동안 원주민들에게 금을 빼앗고 500명이 넘는 원주민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 콜롬버스는 금과 노예를 스페인 왕실에 바쳤고 비록 인도의 향신료는 아니었지만 그가 가져온 것들은 여왕의 환대를 받았다. 그일로 더욱 신임을 얻은 콜롬버스는 2번의 항해를 더 떠났지만 끝내 인도를 찾는것은 실패 하고 말았다.

 

 

콜롬버스 항로

 

그러던 1504년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이 죽자 그뒤를 이어 페르디난드 2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러자 대신들은 콜롬버스를 사기꾼으로 몰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페르디난드 2세는 콜롬버스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지위마저 박탈해 버렸다. 모든 부와 명예를 잃은 콜롬버스는 비참한 말년을 보내야했는데 그러던 1506년 콜롬버스는 임종을 눈앞에 두게된다. 콜롬버스는 죽어도 스페인땅을 밟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다. 유가족들은 콜롬버스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신대륙인 쿠바땅에 붇어주었다.

 

 

 

크리스토퍼 콜롬버스 [Christopher Columbus]

 

 

그런데 392년후 1898년 스페인령이었던 쿠바가 독립하게되자 쿠바땅에 있는 콜롬버스의 유골이 훼손될것을 우려한 스페인 당국은 그의 유골을 다시 스페인으로 가져와 매장하려했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콜롬버스의 마지막 유연때문이었는데 스페인정부는 고심끝에 한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그의 유골이 땅에 닿지 않도록 네개의 조각상이 관을 떠받들고 있는 형태로 특별제작했고 콜롬버스의 마지막 유언을 지켜 주었던 것이다.

 

인도를 찾아 떠났던 콜롬버스의 항해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신대륙 발견이라는 큰 업적을 낳았고 아직까지도 그는 위대한 탐험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