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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최고의 해상사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Wilhelm Gustloff [마지막 여행][서프라이즈]

1912년 4월 10일

 

2,200여 명의 승객을 태운 여객선이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떠나 미국 뉴욕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출항한지 4일만에 빙산과 충돌1,505명의 사망자와 함께 침몰하였다. 이 여객선이 바로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낸 최대 해상 재난 사고로 기록된 타이타닉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진 타이타닉호의 비극보다 더욱 끔찍하고 처참했던 또하나의 숨겨진 해상 참사가 있었다.

 

 

 Titanic 타이타닉

 

1945년 1월 30일 아침 동프러시안 기드니아

초대형 유람선이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한채 유유히 항구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날밤 발트해 한복판에 있던 유람선이 갑자기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과연 이 배에는 무슨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배의 이름은 바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Wilhelm Gustloff (독일의 초호화 여객선)

규모 : 총 25,484톤

수송인원 : 총 1만 명

총 제작비 : 2,500만 제국 마르크

 

1937년 5월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진수식이 열렸고 이자리에 아돌프 히틀러, 나치 조직국장 로베르트 라이,해군대장 라에더제독등 독일의 수뇌부들이 모두 참석한것으로 보아 독일에서 이배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짐작할수 있다. 나치 독일은 KbF(Kraft durch Freude) 즉 국민들의 심신 단련과 휴양을 목적으로 이배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당시 폭스바겐의 비틀 자동차와 국민 라디오와 함께 나치 선전 도구로 이용되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원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호, 하지만 진수식에 참석한 히틀러는 유태인에 의해 최초로 암살당한 스위스 나치당의 총수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이름을따 배의 이름을 지음이로써 또 하나의 나치 선전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1938년부터 그 다음해 여름까지 주로 대서양, 지중해, 노르웨이등 운항했으며 안락하고 쾌적한 해외여행을 위한 각종 운동 시설, 대형 수영장등 다양한 위락시설들이 마련되어 있어 배안에는 연일 사라마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1929년 9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더이상 출항을 할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중 빌헬름 구스틀로프호가 발트해에 다시 그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배안에는 더이상 웃음소리가 들리지않았고 심음소리와 절규만이 가득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가 관광으로써의 여객선이 아니라 부상병을 나르는 병원선으로 그 목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1940년에는 U보트 훈련 학교 요원들의 숙소로 활용되는등 본격적인 전쟁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러던중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졌고 그동안 독일군의 만행에 시달렸던 소련군은 잔인한 복수극을 시작했다. 소련군은 군인들뿐만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민간인들까지 학살했던 것이었다. 이에 독일의 칼 되니츠 총통은 소련군의 노출된 부상병과 민간인 200만명을 독일 서부의 안전한곳에 이주시키기 위한 해상피난 작전, 한니발 작전을 명령했고 당시 여객선이나 화물선, 군함등 모든 종류의 배가 이 작전에 총 동원되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Wilhelm Gustloff 실내

 

그리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도 피난민 구출작전에 투입되었다. 소련군의 만행과 전쟁의 공포에 떨었던 피난민들에게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줄 마지막 희망이자 구원의배였던 것이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배에 탑승한 승객은 부상병을 포함한 군의 수가 1626명, 그리고 피난민이 4424명등 이 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당시 승무원이었던 하인츠 쉰의 증언에 따르면 총 승객은 10.582명 이었고 그중 8,956명이 피난민 이었으며 대부분이 여성과 아이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어뢰정 1청의 호위를 받으며 항해를 하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항로를 결정하기 위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에는 총4명의 함장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빌헬름 찬과 프리드리히 패터슨 두사람의 의견이 대립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최고 연장자였던 프리드리히 패터슨의 의견에 따라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발트해의 깊은 바다를 항로로 삼았고 항해등을 켠 채 운항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패터슨의 결정은 틀리고 말았다. 항해등을 켠채로 달린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어두운 밤에도 너무 쉽게 눈에 띄였고 결국 출항한지 하루도 못되어 소련 잠수함 S-13호 (함장 마리네스코)에의해 발견되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뒤를 조용히 뒤따르던 S-13호는 4발의 어뢰를 발사 시켰고 그중 3발이 명중했다. 어뢰를 맞은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에서는 아비규환이 되었고 어뢰 공격을 당한후 1시간 10여분만에 침몰했다. 그 배에 타고있던 피난민들은 어뢰에 직접적인 충격으로 사망하거나 발트의 차가운 바닷물에 빠져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100,00여명의 넘는 피난민중 9,343명이 목숨을 잃었고 지금까지 최대의 해상사고로 알려진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의 사망자보다 무려 6배나 많았다. 그러나 역사상 최댜의 인명 피해를 낸 해상 재난 사고였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전쟁이 끝난후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비극은 침묵속에 뭍히고 말았다. 그 이유는 전쟁을 일으킨 독일 국민에게 일어난 사고 였기 때문이었고 당시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은 독일인들은 그어떤 동정조차 받지 못했다. 그리고 사고 발생 57년 후인 지난 2002년 한권의 소설이 발표되면서 그동안 금기시되어 오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사건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소설이 바로 독일의 대표작가이자 소설 <양철북>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작가 귄터 그라스의 <게걸음으로 가다>였다. 이 소설이 아니었다면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사건은 영원히 수장되었을수도 있었던것이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안타깝게 죽어갔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피난민들 지금도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그 비극을 간직한채 

 

 

 

북위 55도 7분, 동경 17도 41분, 수심 60m해역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