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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피우메 쟁탈작전 <단눈치오> [서프라이즈]

1938년 이탈리아 가르도네 리베라의 한장례식장!

 

한남자가 깊은 슬픔에 빠져있는데 그는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였다. 1918년 파리 , 파리평화회의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평화회의장에서는  참전국들의 전후배상문제 논의가 한창진행중이었다.

 

 

 

 

사실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 초기에 독일과 동맹을 맺었으나 연합군 측으로부터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항구도시 

피우메 영토를 약속받고 우회하였다

 

지중해 북부 아드리아해 연안을 끼고 있는 피우메는 당시 최고의 무역항이자 전략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피우메가 이탈리아 영토가 될경우 이탈리아가 보게 되는 경제적  군사적 이익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다른 승전국들은 패국이었던 독일에게 받을 배상금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피우메 문제에 관심이 있던쪽은 오직 이탈리아 정부뿐이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이 피우메문제에 소극적인사이 이탈리아 정부가 그토록 원하던짱 피우메가 점령당했다.

 

 

 

 

 

피우메를 점령한 남자는 엉뚱하게도 이탈리아의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무려 52세 였는데 그를 따르던 2000여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피우메 땅을 점령 했던것이다. 단눈치오가 피우메에서 곧 물러날것이라 기대했던 이탈리아 하지만 이탈리아의 기대는 곧 산산조각 났는데

 

피우메에서 단눈치오 정권이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는 독특한 그의 통치 방식 때문이었다.

당시 자유사상으로 피우메를 통치했던 단눈치오는 매일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유와 낭만에 대한 사상을 주지시켰다.

그러한 단눈치오의 통치방식은 오랜시간 종교적 억압과 정치적 탄압속에 살던 사람들을 완전히 사로 잡았고 사람들은 단눈치오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때문에 오래가지 않을거란 예상을 꺠고 단눈치오 정권을 유지 할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이탈리아 시민들까지 피우메로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탈리아 정부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무력으로 진압하자니 국제사회의 눈치가 보이고 그냥 놔두자니 피우메가 독립국으로 자리 잡을까봐 조바심이 났던것이다.

 

결국 단눈치오의 피우메 점령으로 전쟁후 아무거도 얻지 못한 승전국으로 국권을 실추한 이탈리아 정부 땅에 떨어진 국가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고 단눈치오를 피우메 땅에서 쫒아내야 했던 이탈리아 그들이 찾아낸 한가지 묘안이 있었다.

 

피우메로 들어가는 식령 보급로를 차단해 물가를 폭등시키고 식량난과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시민들이 피우메에서 단눈치오를 쫒아내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식량난이 피우메 전역으로 퍼져가며 수백명의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 하였다

 

 

 

 

피우메가 국제 사회로부터 완전한 독립국으로 인정될경우 1차세계대전후 미국의회에서 발표한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에 따라 경제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그렇게되면 이탈리아 영토가 될가능성은 더욱더 희박해 졌다

 

 

 

1920년 라팔로.

 

 

원래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영토였던 피우메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과 공동관리 하기로 조약을 맺었다 이탈리아는 라팔로 조약을 근거로 피우메에서 단눈치오를 끌어내리고 훗날 이탈리아가 단독으로 그땅을 소유하려 했던것이다. 단눈치오의 자유사상이 피우메의 규제와 도덕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술과 마약 자유연애주의에 빠졌다. 피우메는 매음굴, 범죄자를 위한 탈출구라 불렸다. 단눈치오 역시 그생활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단눈치오를 끌어내리기에 적기라 판단한 이탈리아 정부는 라팔로 조약을 근거로 피우메에 해군 함대를 보낸다. 이탈리아는 피우메 항구를 봉쇄하고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단눈치오의 왕국은 1년만에 무너지고 단눈치오는 고향인 이탈리아로 쫒겨나고 말았다

 

 

5년뒤

 

 

 

이탈리아를 새로 집권하게된 무솔리니가 피우메땅을 무력 점령하며 이탈리아 영토로 편입 되었다 그런데 이탈리아 정부에서 그토록 끌어내리려 했던 단눈치오를 무솔리니는 그를 정치스승이자  정신적 지주로 예우했다 이천명의 추총자들에세 지지를 받았던 단눈치오의 리더십에 깊은 정치적 영감을 받은 무솔리니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엠마누엘라 3세는 무솔리니의 뜻에 따라 단눈치오를 몬테네보소공 이라 봉하며 공작의 지위를 주었다 말년을 호화롭게 보내며 왕립아카데미 학회장 까지 지낸 단눈치오는 고향인 가르도네 리베라에서  75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