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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카사노바에 대한 잘못된 생각

 

 

 

굉장한 여성편력의 소유자이며 자유분방한 삶과 쾌락을 즐겼다고 알려진

 

지아코모 카사노바 [Giacomo Girolamo Casanova]

 

그런데 수세기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바람둥이 이미지가 잘못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카사노바가 단순한 바람둥이가 아니라 사회의 중추적인 인물이라는 설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있다. 

 

 

 

Universita degli Studidi Padova

 

 

780여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명문대 파도바 대학 바로 이곳은 카사노바의 정체를 밝히는 첫번째 열쇠이다.

 

천재성

파도바 대학의 문서보관실은 1737년 이대학교에 등록했다고 쓰인 오래된 학적부와  수재들만 모이는 파도바 대학에 카사노바가 입학했을당시 그의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기록에 따르면 카사노바는 어린 소년이었음에도 히브리어와 라틴어에 능통했으며 어려운 고전문학을 줄줄이 꿰고있는등 다방면에서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대학때부터 각 장르를 망라한 카사노바는 베네치아와 유럽곳곳에서 위대한 문화인으로 인정했고 현재까지도 유럽각국의 서점에서는 카사노바의 족자코너를 따로 운영하는등 그에대한 관심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카사노바가  최초로 고대 그리스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당대 최고의 철학가  볼테르에 관한 비평서는 관련학자들에 호평을 받기도 했으며 카사노바가 집필한 소설과 시, 철학서와 수학연구서는물론 의학서적에 이르기까지 그가 남긴 전문서적또한 당대 독보적인것으로 알려져있다. 게다가 1791년에는 모차르트의 가곡 돈지오반니 공연을 준비하던 괴테가 카사노바를 찾아와 그의도움을받아 공연의 가사를 마무리 할수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러한 정황들이 카사노바가 단순한 바람둥이가 아니라 다방면에 뛰어났다는 주장에 그 근거로 제시된 것들이다.  

 

 

 

 

 

 

 

 

 

그렇다면 왜? 카사노바는 이런 지적인 활동에도 세상에 호색한으로만 알려지게 되었을까? 

일각에서는 카사노바가 남긴 10권의 자사전 <나의 인생 이야기>가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방대한 자서전 대부분의 내용이 카사노바의 연애담으로 카사노바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무려 122명 이었으며 귀부인에서 농촌아낙은 물론 수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신분, 국적, 나이를 초월해 세계각국의 여인을 만났다고 기록했는데 이러한 내용때문에 사람들이 카사노바를 바람둥이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호색한으로 불리는것이 연애담 때문만이 아니라는 반론과 함께 카사노바의 비밀을 푸는 두번째 열쇠 출생이 화두에 올랐다.

 

 

 

 

 

 

출생

관련학자에 따르면 18세기 귀족사회였던 당시 카사노바의 부모는 천한 신분으로 구분되었던 연극배우 였다고 한다. 때문에 부모에게 천한 신분을 물려받게된 카사노바는 장볍이 높은 신분사회에 불만이 있었다고 하는데 오랬동안 카사노바를 연구해온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알베르토 토죠페에 따르면 여성을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군림했던 당시 남성들과는 달리 카사노바는 비하되던 여성들에게 차별없이 인격적으로 대했고 그것이곧 여성을 유혹했다는 오해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카사노바도 상류층 진입에 대한 욕망이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는 군인이나 사제가 되어서라도 서민 취급을 받는 자신의 신분을 벗어나고자 노력했고 천한 신분을 벗어나기위해 극단적인 선택을까지 하게 되었다고 토죠페는 주장했다. 그것은 바로 카사노바는 당시 베네치아의 스파이였다는 것이었다. 그의말에 따르면 당시 카사노바는 베네치아  정부를 위해 은밀히 정보를 수집하는등 비밀임무를 수집하며 갖가지 활동을 했다고 하는데

 

 

 

 

첩보활동 증거

카사노바가 여성편력의 소유자라고 각인되면서 까지 마담 듀페와 같은 최고 귀족을 상대했던이유가 바로 스파이활동을 원활이 하기 위한것이라고 하는데 당시 일반인이라면 여건상 쉽게 이동할수없는 프랑스 취히리등을 전유렵을 카사노바는 너무나 쉽게 활동무대로 삼았다는점과 그의 회고록에서는 "로마에서 클레멘스 13세로부터 교황청 기사 직위를 받았다." , "유럽 전역의 여러 나라의 왕들과 권력자들을 만나고 다닌 일이 흥미로웠다. " 라고 기록한 부분이 스파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토죠페가 주장하는 카사노바의 스파이 주장의 결정적인 근거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난봉으로 수감된적이 있는 카사노바가 감옥을 탈출한 사건으로 스파이가아니라면 할수없는 2가지 의문의에 행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첫째가 당시 살인범이나 흉악범만 보내지던 악명높은 감옥에 카사노바가 갇히기에는 죄목이 너무 가벼웠다는점 두번째는 카사노바가 얼마지나지 않아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가둘때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제 나도 자유를 찾아 떠나며 당실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겠다"는 메세지를 남기며 보란듯이 감옥을 탈옥했다는 점이다. 특히 경비가 삼엄한 감옥 탈옥 사건은 일반인이라면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것은 곧 카사노바가 스파이였기 때문에 가능한것 일것이라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카사노바가 감옥에 수감된 이유에 대해 당시 베네치아 정부는 특정한 인물이 인기를 얻게되는것을 굉장히 두려워 하고 싫어 했으며 특히 귀족도 아니면서 사람들사이에서 부각되는 카사노바를 가시같은 존재로 여겨 투옥을 결정한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카사노바의 스파이 논란은 그 주장을 옹호하는 측과 반대하는측 양측으로 나뉘어 지금까지 논란을 이어오고 있다.  

 

 

 

카사노바 의자

 

 

하지만 분명한것은 당시 카사노바는 재정문제로 곤란을 격고 있던 파리시의 문제 해결을위해 루이15세에게 복권 제도를 권해 프랑스 최초로 복권 제도를 도입한 장본인이라는것과 현대 벤처 사업가에 버금가는 그당시 사업가로써의 활약과 패션디자인연구가, 요리사 까지 아우르는 사회활동으로 그사회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화려 하지 않았다. 말년에는 체코 독스 성에 정착해 도서관의 사서로 일했던 카사노바는 당시 귀족들이 위엄을 지키기위해 침대에서 죽지 않았던것처럼 의자에 앉아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렇게 카사노바가 숨을 거두었던 의자는 지금도 남자가 앉으면 카사노바 처럼 완벽한 사랑을 할수 있다는 전설을 지닌채 보존되어 있다. 이렇듯 숱한 염문과 전설을 남기며 세계인에게 회자되는 남자 카사노바 그의 생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