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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건설하는데 632년이나 걸린 독일 쾰른 대성당 [쾰튼 시민의 눈물][서프라이즈]

 

 

 

쾰른 대성당 이라고 불리는 화려하고 웅장한 독일 성페타 문트 마리아 대성당

 

이곳이 성당으로 제모습으로 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632년

 

기나긴 세월이 흐른뒤에야 비로소 신의 처소가 완성될수 있었는데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600여년의 시간동안 대성당 건립의 족쇄가 되었던 것일까?   

 

쾰른시에 우뚝 솟아있는 두개의 첨탑 쾰른대성당은 독일최초로 고딕양식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예술적 상징물이자 자국민의 정신적 성지로서의 의미가 있는곳이다. 쾰른성당은 카롤링거 왕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소박하고 작은 성당에 일어난 화재, 이때 사람들은 화마가 삼켜버린 성당을 고쳐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1164년 에서야 공사를 재개 하게 되는데 때마침 대주교, 라이날트 폰 닷셀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성삼왕 즉 예수 탄생을 경배하러온 세사람의 동방박사 유골을 성당에 안치하기로 하면서 이곳은 역사적 전환점을 맞게 된다. 성삼왕의 유골 안치에 걸맞은 장재한 대 성당을 바치기로한 1248년 당대 거장이었던 건축가 게르하르트를 초빙했고 성당 건물의 탑등 다양한 지식과 기법의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갔다. 이후 게르하르트의 설계대로 초석을 놓은뒤 312년이 흐르는 동안 최대 성당을 목표로한 쾰른 대성당은 중간 정도 건립이 되었다. 당시 성당 건립에 쓰인 단한장의 설계도는 게르하르트가 죽은뒤 1308년 까지 총 세명의 건축가에게 인계되었고 1353년에는 네 번째 건축가 미하엘이 설계도에 따라 건립을 이어갔다. 65미터의 나무 기중기로 돌을 하나씩 운반하며 일일이 손으로 공을 들였던 쾰른 시민들

 

 

기중기가 있었던 퀼른 대성당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문화제를 건립중인 1794년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했다. 다급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성당 골조에서 기중기 조차 내리지 못하고 그대로 박아둔 채 프랑스의 억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후 전쟁으로 황폐해진 쾰른의 한마을에 성당의 건축을 맡았던 미하엘이 조심스레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가 들어선 창고에는 이미 건축에 참여했던 책임자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하엘은 양피지로된 쾰른성당의 꺼내어 펼쳤다. 그리고 사람수만큼 조각을 낸 설계도는 모인사람들에게 각자하나씩 나누어 주었는데 당시 나폴레옹군대가 쾰른을 점령했던 기간동안 프랑스에서는 독을 예술작품을 싸게 팔거나 파기했고 교회또한 무참하게 무너뜨리며 문화를 몰살하기 일쑤였다. 때문에 성당의 치밀한 건립도면은 프랑스에 넘겨줄수 없다고 판단한 미하엘은 하나밖에 없는 설계도면을 여러게로 잘라 성당구역별로 한사람씩 나누어 가진것이다. 결국 성당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나눠가진 모든 조각을 찾아 내야지만 가능한 일이 된것이었다. 그런데 전쟁중 쾰른시민의 손으로 짓던 성지를 나폴레옹 군대가 마구간으로 쓰는 모욕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을본 예술학자 부아세레는 침통함에 빠져 들었고 성당의 건립을 추진하기로 결심 양피지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쟁 종식후에도 수십년간 행방을 찾을수 없었고 때문에 기중기가 박힌 성당은 위태롭게 서있을수 밖에 없었다.

 

 

현재의 쾰른 대성당

 

그렇다면 왜 성당을 완공할 수는 없었을까?

쾰른을 설계했던 13세기 당시 유럽의 건축물은 고직양식이 지배적이었다. 그중 성당의 설계는 고딕양식 중에서도 너무나 과학적이고 복잡해서 그누구도 남은 부분을 어떻게 완공해야 할지 가늠하지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부아세레는 흩어져 있던 설계도 조각을 반듯이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찾을수 없었던 마지막 한장의 설계도 조각을 수년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지막 설계도를 찾게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직후 양국이 협상하던날 프랑스에서 가지려했던 설계도 조각을 짐꾼이 실수로 떨어뜨렸고 그것을 주었던 독일인의 후손이 도면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건축가에게 의뢰하면서 마지막 한장의 설계도가 세상에 나온게 된것이었다. 그런데 건립을 추진하던 부아세레 앞에 뜻밖에 인물이 방해했다. 그는 바로 작가 하인리히 하이네 였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저기좀봐 달빛 속에 거대한 녀석을 그놈이 악마처럼 검게 솟아있지 그게 쾰른의 대성당이야 -하이네의 시 일부" 하이네는 쾰른 대성당을 검은 악마로 하며 시를 짓는등 대성당 건립에 반발하며 나서기 까지 했는데 독일의 대표작가이자 , 정치가, 과학자였던 그는 신앙보다는 인간의 이성을 예의보다는 자유분방함을 선호 했고 고딕양식보다는 로코코양식을 선호했던 예술가였다. 하지만 대성장 건립배경은 하이네의 모든 사상에 반대되는 것이었고 때문에 그는 강력하게 건립을 반대했다. 이런 하이네의 반발에 부아세레는 자신의 심경을 글로 써내려 갔다. 그리고 그글을 대문호 괴테에게 보냈는데 얼마후 놀랍게도 편지를 받은 괴테가 부아세레를 만나기 위해 직접 독일로 찾아 왔다. 그리고 괴테는 독일 내무부 장관에게 탄원서를 보내기 이르는데 내무부장관은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던 대문호의 편지를 무시할수 없었다. 장관은 즉각 쾰른 성당의 보수를 위해 필요한 자금을 국고에서 조달하는 효력을 발휘했고 이로써 공사가 재개 되었다. 하지만 1854년 부아세레가 세상을 뜨자 건축지휘자를 잃어버린 성당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다시한번 위기에 봉착했다. 그런데 국왕 빌헬름 4세가 이를 외면하자 사람들은 침통해 하며 생각끝에 건축복권을 발행해 경비를 조달하였다.

 

 

 

 

그리고 초석을 놓은지 632년만인 1880년 10월 15일 시민들의 힘으로  157미터 높이의 성당이 완공되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완공 당시 재위했던 빌헬름 1세가 뜻밖에 재안을 했다. 그는 건립을 멈추게 했던 나폴레옹 전쟁당시 프랑스 군이 전리품으로 남긴 대포를 녹여 쾰른 성당에 거대한 종을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이종은 공식적으로 완공 선언을 하기 직전 <황제의 종> 이라 이름 붙였고 이는 국왕의 과업과 동시에 군주제의 상징으로 치부하려는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다. 이로써 대성당은 완공되는 순간까지도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이미지를 더럽히고 말았다. 하지만 쾰른 대성당의 불운은 끝나지 않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또 다시 대성당이 폭격당했고 이후 신기술로 복원되어야 했던 것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성당 대신 대형 쇼핑몰 건립이 추진되면서 1996년과 2004년 유네스코가 위험에 빠진 유산으로 지정했다. 

 

 

 

 

세계를 압도하는 쾰른 대성당의 장엄함 그리고 명성에 숨겨진 기구함 그명성이 바닥까지 추락할 위기를 맡은 지금 쾰른 대성당은 632년 이라는 어마어마한 공사기간이 세계의 기록으로 나있지만 쾰른 시민들에게 그 기간은 눈물이요 쾰른 대성당은 불운의 성지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