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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흑사병 원인과 사라진 이유 [변종 흑사병][서프라이즈]

 

 

1347년 흑해 북쪽에 위치한 제노바의 무역기지 "카파"는

 

당시 동유럽과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는 칭기즈칸의 후예 몽골 기마병으로부터 포위 당하고 

있었다.

 

이는 칸의 사망후 몽골의 혼란을 틈타 동유럽국가들이 반란을 일으켰던것에대한 보복공격이었다.

 

그러나 몽골군의 공격은 유럽인들로써는 도저희 상상할수 없는 방식의 전쟁이었는데

 

그들이 대포를 쏘아 카파의 성벽 안으로 던졌던 것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흑사병으로 죽은 썩은 시신이었때문이었다.

 

몽골인들은 유럽인들의 사기를 꺾기위해 시신을 날려 보냈을 뿐이지만 이후 벌어진 결과는 

엄청났다.

 

시신을 쏘아보낸 몽골군도 시신 공격을 받은 유럽군들도 미처 예산치 못했던 결과 였다.         

 

 

유럽인들은 성안에 쌓인 흑사병에 감염된 시신들을 모아 제노바 시에 떨어진 한적한 장소에 버렸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시신속에  기생하던 쥐벼룩이 흑사병에 감염된체 쥐로 옮겨 갔고 흑사병에 감염된 쥐들은 다시 사람들 사이를 다녔다. 그리고 감염된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되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게다가 카파 성에 살던 이탈리아인들이 성을 탈출해 항로를따라 고국 이탈리아로 피난을 떠난것이다. 이때 흑사병균은 상인들의 옷이나 물건, 혹은 배를 같이탄 흑사병에 감염된 쥐나 이미 감염된 환자를 통해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사람들의 무방비 상태속에서 1347~1350년 4년간 흑사병 감염은 확산되었다. 1348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외곽 피아렌차에도 흑사병이 돌기 시작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탁발수도사 "미켈레 디 피아차"는 마을사람들로 부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후세에 전해달라고 권유받았고 이후 참담함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흑사병에 전염된 사람들의 사타구니나 겨드랑이에 종기가 생겨났다. 병이 몸 전체로 퍼지면서 환자는 심하게 피를 토했고 토혈 증세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나 손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심지어 고통에 몸부림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많았으며 죽음이야 말로 증상의 고통에서 빠져 나올수 있는 유일한 은총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고 전했다. 

 

 

 

 

현대의 전문가들은 이렇게 흑사병이 유럽전역으로 확산된 원인은 당시 활발한 무역에 의한 잦은 왕래와 도시의 비위생적 환경 때문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흑사병에 대한 무지로 인해 잘못된 예방및 치료법의 유행으로 흑사병 예방에 역효과를 내기도 했다는데 예를들어 개와 고양이가 흑사병균을 옮긴다고 생각해  국가 예산까지 들여 개와 고양이를 죽였고 그바람에 흑사병의 진범인 쥐가 더욱 번식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공기를 통해 균이 전염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아무소용도 없는 불이나 악취를 통해 독을 중화시킨다고 믿기도 했다. 이외에도 흡연자는 흑사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문때문에 흑사병 예방법으로 담배가 널리 이용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결국 흑사병에 관한 지식의 한계로 인해 병을 키우게된 유럽 인구는 적어도 3분의1 감소 약 2,500만여명이 희생되었다. 


유럽인구가 다시 흑사병 이전 인구로 되돌리는데는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17세기쯤에 회복되었을 정도로 엄청난 인명피해 였다. 그만큼 중세 유럽 흑사병은 인류역사상 최악의 생물학적 질병으로 기록되고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흑사병만으로 희생되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신의 흉물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미신과 광기에 사로잡혀 신의 분노에 대한 책임을 유태인에게 돌리기도 했다. 이는 흑사병이 유태인에게 전염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유태인들은 성경의 예법에 따라 손발을 자주씻어 청결하게 하여 병에대한 예방력을 키웠으며 전염병환자가 발생하면 가족이든 아니든 무리밖으로 격리 시킴으로써 전염병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오히려 오해를 만들며 유태인들이 흑사병으로 죽은 시체의 종기를 잘라 연고로 만들어 벽이나 문에다 바르고 우물에다가 독을 풀어 흑사병이 생겼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본격적인 유태인 대량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훗날 유태인 학살의 시초였다. 특히 1348년9월 스위스 쉴론 [Chillon]에서 열린 재판에서 한유태인 의사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독을 풀었다고 자백하면서 유태인 학살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단 화형 방식으로 2천여명의 유태인들이 희생당했다. 하지만 실제로 유럽인보다 유태인들이 흑사병의 피해가 많았던 것으로 밝혀 지면서 결국 이러한 유럽인들의 광기는 잘살았던 유태인들의 고리대금에 의한 피해와 적개심이 표출된 것으로 풀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4년동안 유럽대륙을 휩쓸며 중세 유럽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흑사병은 이후 300년동안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다. 


하지만 1665년 유럽의 마지막 재앙이라고 불린 런던 대역병이 발발하여 7만여명의 런던시민의 희생이후로 점차 감소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17세기 흑사병이 자취를 감출무렵 유럽 각국의 공중보건 정책과 주민들의 건강및 발육상태가 흑사병에 맞설수 있을만큼 충분히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런던 건물 자재였던 짚대신 기와를 쓰기 시작하면서 쥐와 벼록이 급격히 감소되었고 흑사병 감염 역시 급속도로 줄었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게 17세기 중반이후 신의 형벌 흑사병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 현대인들은 더이상 흑사병 공포는 없다고 믿고 있다.

 

 

수잔 스콧과 크리스토퍼 던컨 교수의 흑사병의 귀환

 

그런데 2005년 영국 리버풀 대학의 역사학자 수잔스콧[Susan Scott]과 동물학자 크리스토퍼 던컨[Christopher Duncan]교수는 생각이 달랐다. 흑사병은 완전히 사라진것이 아니라 여전히 잠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연 항생제가 있는 현대 의학시대에 중세에 발병했던 흑사병을 아직도 염려 해야한다는 것이 사실일까? 실제로 그들은 세계 보건기구의 통계자료를 근거로 이제는 대수롭지 않은 질병 흑사병에 의해 1860년 중국 관둥성 대륙, 1890년 인도, 1910년 중국 만주 5만명, 1994년 영국과인도, 2001년 카자흐스탄, 2002년 9월 미국 뉴멕시코 환자 2명외 다수등 새로운 흑사병 발병 사례가 매년 수천건씩 보고되고 있으며 그수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게다가 흑사병이 꼭 쥐나 쥐벼룩에 의하지 않더라도 사람대 사람으로 병균에 직접 전염되는 질병이기 때문에 과거와 비교할수없는 인구밀도와 빨라진 교통수단을 가진 현대에 발병한다면 그파괴력은 중세시대보다 수배 수천배는 클것이라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흑사병은 예방할수 없는 것일까? 


수잔 스콧에의하면 300여년간 흑사병에 대항하면서 축척되어온 내성 항체가 있거나 과거 흑사병에 대해 사람들이 항생제를 맞아 저항력을 키웠다고 해도 최근 발견된 흑사병은 새로운 종류의 변종 흑사병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위생수칙들을 잘따르지 않는다면 여전히 인류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중세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고 또다시 범지구적인 전염병이 될수있다는 흑사병 과연 현대의 우리는 흑사병으로 부터 안전할수 있을까?  

 

 

 

*재생시 주의* 다소 혐오적일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