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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원조 한류 스타 김시스터즈 [Kim Sisters]

 

1960년대 미국의 유명프로그램 <에드설리번쇼>

이프로그램은 1941년 처음 방영된이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TV쇼로 출연자들 또한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롤링스톤스등 당시 최정상급 스타들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뜻밖의 출연자가 등장하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한국인 걸그룹이었다.

 

 

 

 

소녀시대, 트와이스, 여자친구, AOA등 전 세계에 한류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 걸그룹들 그런데 지금으로 부터 60여년전 미국을 뜨겁게 달군 원조 한류 걸그룹이 존재 했었다. 그들은 바로 김시스터즈 였다. 1953년 결성된 김시스터즈는 김숙자와 김애자, 이민자로 구성된 3인조 걸그룹으로 처음만들어질 당시 그들의 나이는 10대였다.

그리고 김시스터즈를 만든 사람은 가수 이난영이었다.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를 불러 국민가수로 이름을 떨치던 이난영은 김시스터즈가 있기전 대한민국 최초의 걸그룹이라고 할수있는 저고리 시스터즈의 멤버였다. 저고리 시스터즈는 이난영 외에도 박향림과 장세정, 이화자등 당시 인기 여가수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걸그룹이었는데 1936년 오빠는 풍각쟁이야와 연락선을 떠난다 등을 작곡한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김해송과 결혼한 이난영은 슬하에 7남매를 둔다.

 

 

 

 

 

김해송의 납북 그리고 이봉룡의 제안

그런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남편 김해송이 납북 되면서 이난영은 졸지에 혼자서 7남매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이에 그녀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이난영의 오빠이자 작곡가인 이봉룡의 제안에 자신의 딸인 김숙자와 애자, 오빠 이봉룡의 딸 이민자 (김민자로 개명)를 김시스터즈로 만든것이다.

이난영은 팝송을 직접 들려주며 무조건 외우게 했고 그녀들은 가사의 뜻도 모른채 열심히 외워 불렀는데 음악가 집안의 아이들답게 곧잘 따라 불렀다.

 

 

 

 

 

김시스터즈의 데뷔 그리고 미국진출

그리고 1953년 미 8군 부대의 무대에서 데뷔한 김시스터즈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공연이 끝나고 군인들에게 받은 위스키와 초콜릿을 팔아 쌀과 소금을 사먹으며 생계를 이어갈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해 수도극장에서 정식 데뷔를 한 그녀들은 영화 <청춘쌍곡선>에도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는데 그로부터 5년후인 1958년 미국의 공연 기획자 톰 볼이 김시스터즈에 대한 소문을 듣고 직접 한국까지 찾아온다.

그리고 그녀들의 실력을 직접본 그는 일단 미국에서 3개월 동안 활동하며 반응을 보기로 하고 계약한다. 그렇게 한국인 걸그룹에서는 최초로 미국에 진출하게된 김시스터즈

하지만 타국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팝송 가사만 외워서 부를줄 알았지 영어를 전혀 못했던 그녀들은 의사 소통 자체가 어려웠고 그러다보니 주방세제로 머리를 감다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으며 김애자는 한식이 그리워서 황달에 걸리기 까지 했다.

그러나 김시스터즈에 대한 반응만큼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당시 신비로웠던 동양인들이 영어로된 팝송을 완벽하게 부르는 모습에 미국인들은 빠져들었는데 여기저기서 공연 요청이 쇄도 했고 1960년에 처음 미국에서 발매한 음반속에 들어 있던 노래 <찰리 브라운>으로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차트에 이름을 올린다.

그후 톱스타가 아니면 출연하기도 힘들다는 <에드 설리번쇼>에 출연하며 더욱 유명해진 김시스터즈는 그프로그램에 비틀즈보다 많은 휫수인 22번이나 출연한다. 그리고 1960년도 2월 라이프지에 특집 화보를 장식하고 시카고 TV 표지모델이 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김시스터즈는 어떻게 미국에서 성공할수 있었을까?

그건 역시 이난영의 힘이 컷다. 김시스터즈의 미국 진출이 결정되자 이난영은 미국에서 가수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래만으로 안된다고 판단해 다양한 악기를 배우게 했다. 이에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등 숙자는 13개, 애자와 민자는 10개의 다양한 악기를 연주할수 있었는데 실제로 에드설리번쇼에 출연 할때마다 매번 다른 악기를 가지고 나와 MC와 관객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또한 철저한 사생활 관리를 주지시킨 이난영 때문에 커피 데이트 신청이 들어와도 꼭 세명에서 같이 나갔으며 심지어 맏언니 숙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데이트 신청도 바쁜 스케쥴 핑계로 거절했다.

결국 이러한 이난영의 가르침과 김시스터즈의 노력으로 미국내 1인당 국민소득이 약 2,000달러 였던 1960년대 미국 주급으로 1만 5,000달러의 출연료를 받았으며 50만 달러를 세금으로 낼정도로 대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1963년 김시스터즈는 이난영을 미국으로 초대해 <에드 설리번 쇼> 무대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후..

하지만 그러부터 2년뒤인 1965년 안타깝게도 이난영은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이후 김시스터즈는 남자형제 김영일, 김태석, 김상호로 구성된 김브라더스와 함께 6인조로 활동을 이어갔으며 한국을 떠난지 12년만인 1970년 서울 시민회관에서 귀국공연을 올리며 금의환향했다고 한다.

한국 걸그룹 최초로 미국에 진출해 엄청난 흥행을 이끈 김시스터즈, 1987년 김애자는 암으로 사망했으며 김숙자는 현재 미국 라스베거스 에서 김민자는 헝가리에서 음악인 남편과 함께 여전히 현역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러한 김시스터즈의 스토리는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 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