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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잔다르크의 유골 진위여부 <서프라이즈>

2007년 프랑스 툴루즈 대교구 대주교 베르나르 니콜라 오베르텡은 한통의 보고서를 받고 충격에 휩싸인다. 대주교 니콜라 오베르텡이 받음 보고서는 프랑스의 성녀 잔다르크 유골의 진위여부에 대한 보고서였다.

 

 

1867년 파리의 한약국 약사들이 무너진 천장을 수리하고 있었다. 천장을 수리하던 약사는 천장에서 떨어진 먼지로 뒤덮인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상자의 겉표면에는 오르레앙 성처녀 잔다르크의 유물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고상자안에는 두개의 유리병이 있었는데 각각 하나씩의 뼛조각이 들어 있었다. 잔다르크의 유물이 발견됬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잔다르크를 연구하던 전문가들이 모여  유골함의 진위여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두개의 뼛조각은 사람의 갈비뼈와 고양이의 넓적다리뼈로 밝혀졌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주목했던것은 두개중 하나의 유리병에 담긴 고양이의 뼛조각이 였다. 고양이 뼈가 발견됐다는것은 유골의 주인이 마녀로 몰려 화형 당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15세기 유렵에서는 마녀로 몰아서 화형 시킬때 고양이를 함께 던졌기 때문이다. 잔다르크역시 마녀로 몰려 화형당했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발견된 유골이 잔다르크의 것임을 확신 했다. 잔다르크의 유골로 판명나자 프랑스 전역은 환희에 가득 찼다. 15세기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구했던 성녀 잔다르크의 유골이 430년만에 세상에 들어 났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대교구에서는 즉시 잔다르크의 유골을 툴루즈 대성당 지하에 안치 했는데 그곳은 대대로 신성시된 왕과 교황들의 시신이 안치되는 곳이었다. 그뒤로 툴루즈 대성당은 프랑스 국민뿐 아니라 전세계인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고 잔다르크의 유골은 프랑스의 역사적 유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던 2006년 프랑스

 

매일같이 잔다르크의 유골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대주교 베르나르 니콜라 오베르텡은 고민에 빠졌다. 백년전쟁당시 포로로 잡힌 잔다르크를 증오 했던 영국이 그녀의 시신을 두번이상 불태워 센느강에 버렸다는 것이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고 이로인해 잔다르크 유골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은 끊임이 없었다. 결국 프랑스 대교구는 잔다르크의 유골이

진짜라는것을 입증해 보이기로 결정했다.프랑스 대교구는 유골연구의 최고권위자 필리프 샤를리에 에게 잔다르크 유골의 진위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의뢰했는데 의뢰를 받은 필리프 박사와 연구팀이 주목한것은 유골에서 나는 바닐라 향이었다.

 

바닐라 향은 바닐린이라는 성분에서 나오는 것으로 유골에서 바늘라향이 난다는것은 시체가 부패되는 과정에서 바닐린 성분이 만들어 졌다는것을 의미했고 따라서 화형된 유골이라면 바닐라 향이 날수 없었던것이다.

 

 

 

예상대로 필리프 박사 연구팀은 유골에서 바닐린을 검출했고 이는 화형된 유골이 아니었음을 의미 했다. 필리프 박사의 연구팀은 유골이 이집트 미라라고 발표 했다. 왜냐하면 바닐린은 주로 이집트 미라에서 검출되는 성분이었기 때문이다. 유골이 잔다르크의 유골이 아닌것으로 밝혀지자 대교구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미칠 파장을 우려했다.

 

그동안 프랑스 대교구에서는  잔다르크의 죽음을 순교라 칭했고 잔다르크를 성녀로 추대하며 유골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대교구에서 신성시해온 잔다르크 유골이 가짜라고 판명되면 대교구의 입장이 난처 해질뿐만 아니라 성녀 잔다르크의 존재 자체를 부인 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을 우려했던것이다.

 

대주교는 미이라의 유골이 파리에서 발견된 점을 들어필리프 박사 연구팀에 이의를 제기 했는데 필리프 박사팀은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 했다.

 

중세 시대 이후 프랑스에서 이집트 미라를 가루로 빻아 허브 즙과 섞어 상처를 치료했고 가루를 직접 복용해 복통과 형액질환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었다 이집트 미라수입이 당시 프랑스에 성행하고 있었다고 주장 했다. 또한 연구팀은 유골에서 나온 송진가루를 두번째 증거로 내세웠는데 유골에서 송진가루가 나왔다는것은 유골이 이집트 미라라는 확실한 증거 였다.

 

 

왜냐하면 이집트에서 미라를 만들때 송진에 담갔던 붕대로 미라를 감는 독특한 풍습 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소나무는 잔다르크가 처형 되었던 당시 노르망디 지역에서는 자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후 연구팀은 유골에 남아있는 탄소를 추출, 유골의 연대를 측정했는데 탄소연대 측정결과 유골은 기원전 3~6세기경의 것으로 판명되었고 이는 잔다르크 생존시기인 15세기와는 전혀 다른 시기였다

 

 

결국 잔다르크의 유골은 가짜로 밝혀졌고 이사실은 전세계 사람들과 종교계를 큰충격에 빠트렸다.

 

그렇다면 기원전 이집트 미라의 뼛조각이어떻게 잔다르크의 유골로 둔갑했나?

 

연구팀을 이끌었던 필리프 샤를리에 박사는 잔다르크의 가짜 유골이 만들어진것이 그녀를 성인 반열로 끌어올리려했던

종교적 의도 때문이었던것으로 발표 했다. 또한 일각에서는 18세기말 시작된 프랑스 형명으로 민족주의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프랑스가 자국민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고취 시켜 잔다르크를 영웅화 했다는 것인데 잔다르크의 가짜 유골이 만들어진 배경에는그러한 정치적의도도 있었을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프랑스 대교구는 잔다르크의 유물의 진위여부를 필리프 박사의 연구팀에 의뢰해  괜한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고 전세계 가톨릭 교구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