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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루돌프 황태자 자살인가 타살인가?[마이엘링의 총성][서프라이즈]

1889년 1월 30일 오스트리아 마리얼링

 

 

눈이 소복히 쌓이는 한 사냥숙소 숙소안에는 두 젊은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고 숙소 일층에서는 사냥지기와 하녀가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곳에 한밤의 고요함을 깨고 총성이 울려퍼진다. 총성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 갔을때 사냥 숙소의 방에는 피투성이의 두젊은 남녀가 쓰러져 있었는데 남자의 한쪽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고 다른손은 여자와 손을 꼭잡은채 숨져있었다. 이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못했고 이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들은 바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태자 루돌프[Rudolf Franz Karl Joseph, Kronprinz]와 그의 애인 마리아 폰 베체라 였던 것이었다.

 

 

마리아와 루돌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황후 엘리자베트에서 태어난 루돌프 황태자 그는 병약하고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였다. 하지만 어머니인 엘리자베트황후는 늘자식의 곁을 떠나 있는데에다가 아버지는 황태자를 미래의 최고황제에 걸맞는 인물로 만들기위해 황태자에게 늘엄격하고 권위적이었다. 이렇게 엄격하고 보수적인 아버지로 인해 루돌프 황태자는 항상 애정에 목말라있었고 황제에대한 불만은 계속해서 쌓여갔다. 루돌프 황태자가 22세 되던해에 벨기에 공주 스테파니와 정략 결혼을 하게 되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는 안정을 찾지못했다. 그의 방황은 결혼전보다 더욱 심해지고 방탕한 생활을 하게되는데

 

 

유년시절 루돌프

바로그때 황태자의 눈앞에 그를 사로잡는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는 바로 17세의 어린소녀 마리 베체라 황태자는 그녀에게서 그동안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관심과 애정을 느낄수 있었고 곧 사랑에 빠지게 된다.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의 조건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준 마리아 그녀에게서 위안을 얻게된 루돌프 두사람의 애틋한 마음은 나이와 계급을 초월하고 이내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데 그러던중 뒤늦게 두사람의 관계를 눈치챈 요제프 황제는 그들의 사랑을 완강하게 반대한다. 마리아는 하급 귀족인데에다가 루돌프와 마리아의 사랑이 알려질경우 황태자비의 스테파니의 본국인 비엔나와의 관계가 악화 될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 폰 베체라

 

하지만 루돌프 황태자의 사랑은 멈추질 안았는데 급기야 황제몰래 로마 교황에게 스테파니와의 이혼 요구서를 보낸다. 하지만 교황의 답신이 엉뚱하게도 황태자가 아닌 요제프황제에게 보내짐으로써 황제는 격노 하게되는데 결국 루돌프는 황태자의 자리를 박탈당하게된다. 생애 처음으로 느꼈던 따뜻한 관심과 애정 그때문에 화려한 황태자의 자리도 포기한체 사랑을 선택한 루돌프 황태자 이제 루돌프에게는 마리 밖에 없었다. 또한 마리에게도 루돌프 뿐이었다. 그리고 절망적인 현실에도 불구하고 계급을 초월한 두사람의 사랑은 영원할꺼 같았는데

 

그리고 얼마후 1889년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루돌프 황태자가 마리얼링 사냥숙소 안에서 마리와함께 시체로 발견된 것이었다. 황실에서 발표한 사인은 정신착란으로 인한 자살이었다. 루돌프 황태자의 장례식은 황실의 전통에 따라 카톨릭식으로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의 시신은 황실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마리는 하일리켄 크로이츠 묘지에 안장되었다. 마지막까지 영원히 함께 할수없었던 루돌프와 마리 두사람의 로멘스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으며 사람들에게 불운한 사랑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런데

 

 

 

 

100년이지난 1989년  프란츠 요제프황제 뒤를이은 카를황제의 부인 지타왕비 그녀는 엄청난 주장을 제기한다. 그것은 바로 루돌프 황태자는 자살이 아닌 제 3자의 의해 암살당했다는 것이었다. 왕비의 주장으로 인해 마이엘링 사건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고 있었는데 그러던중 1992년 12월 황태자의 연인 마리아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유해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신속한 수사로 유해는 찾았지만 그것이 진짜 마리아의 것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비엔나 의학연구실에서 진행된 정밀 검사로 마리아의 유해가 맞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이때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총상을 입고 죽었다는 마리아의 유해는 머리에 여러번의 타격만 받은 흔적만 있을뿐 총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타박상의 흔적은 마리뿐만이 아니라 황태자에게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황태자의 시신을 확인했던 교황 사절에 의하면 루돌프 황태자의 유해는 상처 투성이 였다는 것이었다. 개다가 그때 발견된 권총도 황태자의 것이 아니었으며 황태자의 시신에는 6개의 총상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루돌프 장례식

 

자살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에게 여섯발이나 되는 권총을 쏠수있었을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황태자는 자살하지 않은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타왕비 주장대로 황태자의 죽음에 제 3자가 개입한 것일까? 만약 황태자가 암살당한 것이라면 과연 누구의 짓일까? 사람들은 유력한 암살의 배후로 프란츠 요제프황제를 지목한다. 당시에 유럽은 보불전쟁과, 크림전쟁으로 혼란스러웠는데 1870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독일제국을 건설하자 요제프황제는 독일과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루돌프황태자는 독일의 적국인 프랑스나 러시아와 동맹해야한다며 황제와 대립하게 된것이었다. 이런상황에서 프랑스 성향의 극진파들이 황제의 암살을 계획하고 그중심에는 황태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바로 이런정치적 상황에서 황제가 루돌프 황태자를 암살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의문은 또 있었다. 처음 로마 교황청은 루돌프의 가톨릭식 장례식을 부러워했다. 원래 가톨릭에서 자살은 죄악이었기에 자살한 루돌프의 장례식은 카톨릭식으로 치루어 질수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교황에게 장문의 암호전보를 보낸후 장례식을 허가 했다고 한다. 혹시 황제가 교황에게 보낸 전보는 루돌프 사망이 자살이아닌 타살이라는 전보가 아니었을까? 과연 교황을 설득시킨 황제의 전보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 어떤것도 황태자의 죽음을 확실히 설명할수 없었고 유일한 정보인 암호전보역시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루돌프 황태자가 사망한 마이엘링 사건이후 그를 잃은 유럽의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은 점점 위태해졌고 세계의 역사는 전례없는 소용돌이 휘말리기 시작했다. 바로 루돌프를 대신해 다음 후계자로 지명된 페리디난토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것이었다. 

 

세기의 비극적인 로맨스로 알려졌던 루돌프와 마리 그리고 엄청난 역사적 파장을 몰고온 그들의 죽음 수만은 의혹에도 마이엘링 사건에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은채 아직가지도 역사속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