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프라이즈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 Robet Capa의 가방 [진실][서프라이즈]

1939년 프랑스 파리

 

 

독일군의 침공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위기일발의 순간 프랑스국민들은 자신의 본거지를 떠나야만했다. 프랑스인들이 파리를 모두빠져나갔을때 한남자는 전쟁중에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는데 그것은 누군가의 간절한 부탁때문이었다. 친구의 부탁을 들어 주기로 결심한 남자는 전쟁 중심지인 파리를 빠져나와 베르사이유에 도착했다. 이미 도시 곳곳은 독일군이 포진되어있었는데 군인에게 발각되면 생명을 잃게되는 절체절명의 순간 남자는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결국남자는 독일군에게 발각되었고 포로수용소로 잡혀가고 말았다. 그리고 전쟁터에 남겨진 가방하나 로버트 카파 ROBERT CAPA 이름이 새겨진 이 가방에는 과연 어떤진실이 담겨있는 것일까?

 

 

로버트 카파 Robet Capa

 

로버트 카파 [Robet Capa] 그는 1935년 보도사진을 찍기 시작해 이후 세계전쟁 현장을 생생하게 필름에 기록하며 세계적인 종군기자로 인정받게된 기자이다. 유럽전쟁이 발발하고 얼마뒤 신문사에서 카파에게 국내취재를 맞기자 카파는 전쟁에 보내주지 않는다면 사직을 했을정도로 중군기자로써의 열정을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전쟁에 대한 상처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연인이었던 게르다 타로 [Gerda Taro]를 스페인 내전에서 잃었던 것이다. 이후 세계적인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Ingrid Bergman]도 로버트 카파의 곁을 지켰지만 그는 자신에게도 위험한 전쟁터에서 무슨일이 닥칠지 모른다며 기꺼이 그녀의 청혼을 거절했고 항상 전쟁의 위험을 염두하며 살아 갔다.

 

 

어느 병사의 죽음

 

그러던 1954년 베트남에서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이곳에서 쉴세없이 전쟁터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던 카파 하지만 그는 전쟁터의 지뢰를 밟고 사망하게 되었다. 죽음직전까지도 사진을 찍었던 카파덕분에 가려져있던 인도차이나의 전쟁편은 세계곳곳에 보도될수 있었고 전세계에서 카파의 죽음을 애도하며 진정한 저널리스트로 회고 되기도 했다. 그리고 참혹한 전쟁속에서 군인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내면을 표현했던 종군기자 로보트 카파의 기자정신은 이후 카파이즘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탄생하기도 했다.

 

카파이즘

세계적인 전쟁사진가 로보트 카파의 이름에서 따온말로 기자정신을 뜻하는 용어

 

그러다 카파가 찍은 사진중 단 한장만큼은 세계에 논란이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한병사가 총에 맞고 쓰러져있는 사진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사진이 총알이 빗발치는 그 상황에서도 구도와 초점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작이 아니냐는 의혹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카파의 사진만큼 전쟁터에대해 적날하고 현실적인 구도는 없었다며 그가찍은 전쟁사진을 사진의 영화속 한장면에 그대로 오마주하여 의견을 표현 하기도 했다.

 

오마주 [Hommage]

영화에서 존경의 표시로 다름 작품의 주요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용어

 

 

라이언일병 구하기에 오마주된 로버트카파의 사진

 

하지만 카파의 사진은 여전히 논란에 휩쌓여있었고 뉴욕 퀸즈대학의 제럴드 그린 교수가 사진이 조작된게 아니라며 강하게 주장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에서 카파가 찍은 사진전을열어 사람들에게 카파의 사진조작설은 신빙성이 없다고 설명했고 카파가 50년전에 잃어버린 가방만이 논란을 잠재울만한 유일한 단서라고 발표했다. 그 가방안에는 논란이 되고 있는사진 어느 병사의 죽음을 찍었을 당시  형상하지 않은 또다른 필름들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그 가방속에있는 동시대의 필름을 확인할수 있다면 지금놀란이 되고 있는 사진과 비교하여 진위여부를 가릴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단서인 카파의 가방은 1922년 어니스트 허밍웨이 [Ernest Hemingway]가 기차역에서 잃어버린 원고 뭉치와 함께 세계 보물분실사례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던 10년후 카파의 사진을 연구하던 제럴드 교수에게 한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놀랍게도 그편지에는 카파에 가방에대해 알고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고 이를본 제럴드 교수는 지체하지 않고 길을 나섰다. 편지 봉투에 쓰인 이름과 주소를 수소문끝에 찾아낸 제럴드 교수는 편지를 보낸사람을 만날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방이 로버트 카파의 것임을 확인한뒤 제럴드 교수는 그가 가방을 보관했던 사연을 듣게 되는데 

 

2차세계대전 당시 카파는 파리를떠나 자신의 부모와 가족이있는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 그리고 미쳐 챙겨오지 못한 필름을 작업실 책임자이자 친구에게 필름을 보관해 달라고 부탁하게 되었고 친구는 가방을 사수하려했지만 결국 독일군에게 발각되면서 전쟁터에 버려지고 말았다. 가방은 당시 프랑스에 파견되어있던 멕시코의 곤잘레스 장군에 수중에 들어가게되었다. 하지만 10년후 곤잘레스 장군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장군의 후손이 가방을 보관하게되었던 것이다.

 

그러던중 1998년 미국 뉴욕 퀸즈대학에서 제럴드 교수가 주최한 스페인 내전 사진전을 우연히 보게된 곤잘레스 후손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필름이 특별한 것임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제럴드 교수가 애타게 가방을 찾고 있는것을 알게되었고 직접 편지를 보냈던 것이었다. 내막을 알게된 제럴드 교수는 곧바로 곤잘레스에게 카파의 가방을 세상에 공개할것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카파의 가방에는 각각의 종이가방 3개 스페인 내전당시 찍은것으로 생각되는 3500여 통의 필름이 보관되어있었는데 이사실은 지난 2008년 2월 제럴드 교수가 국제 사진센터 ICL에 가방을 의뢰하면서 60년만에 카파의 가방은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카파의 가방을 발견한 사실이 전세계 매스컴에 보도되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되었다. 그것은 바로 50년동안 가방을 보관해온 곤잘레스 장군의 후손들과 가방을 찾았다는 방송을 보게된 로버트 카파의 친동생 코넬 카파 그리고 국제사진센터측의 소유권 분쟁이 일어난 것이었다. 결국 소유권은 국제사진센터로 넘어갔고 이사진의 진위여부를 가리기위한 유일한 단서 가방속 필름은 현재 분석중이라고 한다.

 

전쟁 그리고 그속에서 벌어진 인류의 잔인함에 경악했던 순간들 생생하게 기록에 남겼던 포토저널리즘의 창시자 로버트 카파 좋횡무진 전쟁터를 누볐던 그의 열정 만큼은 뜨거웠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당신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은 것이다.

-로버트카파 Robet Capa

 

그가남긴 말처럼 어쩌면 우리가 카파의 사진속 의미를 보지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로버트 파카 Robet Capa 의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