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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의 악몽 [그녀의 악몽][서프라이즈]

1958년 미국 할리우드

 

한여자가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는 당시 최고의 여배우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이었다.  

오드리 헵번은 한편의 영화 캐스팅을 받은뒤로 매일밤 악몽에 시달렸다.

 

 

 

 

그녀가 받은 시나리오는 조지스티븐스 감독의 안네의 일기 2차세계대전당시 나치의 박해를 받던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를 영화한 작품이었는데 1958년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하는 영화였던 안네의 일기는 1년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3개의 부문을 수상하며 그해 최고의 영화로 인정받기도 했다. 수 많은 여배우들이 자신의 연기력을 입증할 기회로 여겼던 안네의 일기 하지만 가장먼저 캐스팅 제안을 받았던 여배우는 오드리 헵번이었는데 첫출연을 했던 영화 로마의 휴일 한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그녀는 당시 최고의 배우이자 만인의 여인으로 인기 정점에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오드리 헵번은 아침이 되자마자 제작사를 찾았다. 그녀는 그자리에서 모든 여배우가 바라는 영화의 캐스팅 제안을 거절했는데 그런데 그녀는 왜? 영화 안네의 일기의 캐스팅 제안을 거절했던 것일까? 

 

영국출신의 은행가 안소니 헵번 과 엘라에서 태어난 오드리 헵번은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나치독일 세력확장에의해 오드리 헵번의 가정은 산산조각나고 만다. 당시 나치독일의 사상이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가며 벨기에 내에서도 나치에 협력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는데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 안소니는 나치에 적극 동조했고 가정보다 나치 당원에서는 일이 더중요하다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결국 그날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오드리 헵번은 고작 6살의 나이에 불과했다.

 

 

The Diary Of Anne Frank, 1959

 

1940년 네덜란드

벨기에가 함락당하자 오드리 헵번의 식구는 중립국이었던 네덜란드로 이주했는데 벨기에 이후 네덜란드마저 나치에게 점령당했고 그녀는 전쟁내내 배고픔과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당시 오드리 헵번은 유대인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바라보았고 아버지가 끔찍한 가해자라는 사실을 안뒤 큰 충격에 빠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후에도 아버지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하자 자연스레 그가 죽엇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1958년 할리우드

그러던 어느날 오드리 헵번은 찢어진 한통의 편지를 발견한다. 편지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였는데 그녀는 그가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란 사실을 숨긴채 어딘가에서 홀로 살고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가 나치당원이란 사실이 알려져 그녀의 인기에 치명타를 입을 것을 염려했던 어머니 엘란은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를 숨겨 그녀와 아버지 사이를 단절시키려 했던 것인데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안 오드리 헵번은 당장이라도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지만 아버지에 존재가 자신의 배우생활에 안좋은 영향을 끼칠수 있다는걸 알고 있었기에 선뜻 아버지를 찾아 나설수 없었다. 그러던중 오드리 헵번은 영화 안네의 일기 시나리오를 받게된다. 그녀는 시나리오에 큰 감동을 받았지만 영화 출연을 쉽게 결정할수 없었다.

 

그러던 1960년 그녀는 고민 끝에 아버지를 찾아 아일랜드로 향한다. 그녀는 25년만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다시 만날수 있었는데 그녀의 아버지 안소니는 2차 세계대전후 영국의 전범감옥에 투옥되었고 형을 마친후에는 아일랜드에서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숨기고 홀로 외롭게 살아왔다. 그후 나치 전범이었던 아버지를 대신해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구호운동에 바치기로한 오드리 헵번. 일각에서는 인기가 떨어진 그녀가 세상에 주목을 받고 싶어 유니세프를 이용한다고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않고 아프리카, 방글라데시등 전세계 50여곳을 돌아다니며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위해 봉사했다. 또한 오드리 헵번은 결장암 판정을 받은 후에도 그사실을 숨기며 유니세프와 약속한 아프리카 일정을 소화했는데 이런사실이 알려지자 감동한 전세계인들이 구호물자와 기부금을 유니세프로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1993년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날 오드리 헵번은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언론에서는 재통령 취임식보다 먼저 오드리 헵번의 사망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만인의 여인이었던 오드리 헵번 그녀는 나치의 전범이었던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바쳐 봉사했고 사람들은 아름다웠던 그녀의 생애를 기억하며 그녀를 그리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