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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칼린카 밤베르스키 사건) 딸죽인 범인잡은 아버지 [아버지의 복수][서프라이즈]

2009년 독일 바이에른 주 린다우

 

회계사를 하다가 은퇴한 평범한 71세 프랑스인 이었던 앙드레 밤베르스키(André Bamberski) 그는 2009년 갑자기 독일 린다우로 향한다. 밤베르스키는 독일인 디터 크롬바흐(Dieter Krombach)를 납치한다.

 

 

앙드레 밤베르스키(André Bamberski)

 

1977년 밤베르스키는 아내와 이혼하면서 딸 칼린카 밤베르스키(Kalinka Bamberski)와 헤어지게된다. 그후 밤베르스키는 프랑스에서 혼자 살았고 칼링카는 어머니와 독일인인 새아버지 크롬바흐를 따라 독일 린다우에서 살게된다. 딸 칼린카를 몹시 사랑했던 밤베르스키는 애써 그리움을 달랬는데

 

 

칼린카 밤베르스키(Kalinka Bamberski)

 

그러던 1982년 밤베르스키는 듯밖의 전화를 받는다. 딸 칼린카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 즉시 독일로간 밤베르스키는 딸의 죽음 앞에 오열했다. 딸의 갑작스런 죽음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밤베르스키는 장례를 중단시키고 경찰에 시신 부검을 의뢰했다. 일주일뒤 부검결과를 본 밤베르스키는 깜짝놀라고만다. 칼린카에서 두군데의 주사바늘 자국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에 각각 하나씩 주사를 놓은 흔적이 있었다. 밤베르스키는 오른손잡이인 딸이 오른쪽팔에 주사자국이 남아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고 다른 누군가가 칼링카에게 주사를 놓았다고 의심했다. 이상한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검결과 딸의 생식기에서 희끄무레한 물질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부검인은 이물질이 칼링카의 몸에서 나온것인지 남성의 정액인지는 정확하게는 알수 없다고 기록했다. 그러자 딸이 타살당했다고 생각한 밤베르스키는 경찰에 정식으로 수사를 의뢰했다. 독일경찰의 수사결과 칼링카의 몸에 남은 주사자국은 새아버지인 크롬바흐가 주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좌)앙드레 밤베르스키(André Bamberski)                    (우)디터 크롬바흐(Dieter Krombach)

 

20년 경력의 베테랑 의사였던 크롬바흐는 지쳐있는 칼링카를 위해 자신이 철분제 주사를 놔줬다고 말했다. 크롬바흐의 말을 믿지못한 밤베르스키는 그를 의심하게된다.밤베르스키는 새아버지가 딸에게 약물을 투여한뒤 성폭행했으며 약물 부작용으로 딸이 사망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크롬바흐를 성폭행과 살인 혐의로 독일법원에 고소했다. 그러나 1987년 독일 대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크롬바흐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다. 칼링카의 시신에서 약물성분이 검출되지 않은점과 칼링카의 생식기에서 발견된 물질이 크롬바흐의 정액이라고 단정지을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독일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일수 없었던 밤베르스키는 딸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기 위해 프랑스 법원에 고소하기로 했다. 

 

 

 

 

이중국적을 가진 칼링카의 죽음을 프랑스 법원에 호소하기로 한것이다. 프랑스법원에 거듭된 출석요구에도 불구하고 크롬바흐가 끝까지 출석을 거부하자 1995년 프랑스 법원은 궐석재판(피고인이 법정에 출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재판)을연다. 프랑스 법원은 크롬바흐에게 살인죄로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프랑스 법원은 크롬바흐가 마약을 투여하지않았지만 칼링카에게 주입한 철분제 주사가 호흡곤란과 혼수상태 등의 부작용을 일으킬수있다는 점과 의사인 크롬바흐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칼링카에게 주사를 놓은뒤 방치했다는 점을들어 살인죄를 인정한것이다. 밤베르스키는 끈질긴 노력끝에 프랑스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는 크롬바흐가 프랑스에 오길거부한다는 것이었다. 크롬바흐를 프랑스로 데리고오지 않는한 그에게 죄값을 치르게할 방법이 없었던것이다. 거기에다 프랑스는 독일에게 크롬바흐를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독일은 이미 판결이 내려진 사건에 대해서 다시 재판을 하지 않는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내세워 프랑스의 인도 요청을 거부했다. 밤베르스키는 크롬바흐에게 죗값을 치르게 할수없다는 자괴감과 억울하게죽은 딸에대한 미안함에 괴로워했다. 밤베르스키는 더이상 법의 심판을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는 청부업자를 고용해 크롬바흐가 사는 독일 린다우로 향했다. 밤베르스키는 크롬바흐를 납치해 프랑스 뮐루즈로 끌고 왔다. 결국 크롬바흐는 프랑스 경찰에 체포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밤베르스키역시 법의 심판을 피할순 없었다. 크롬바흐를 납치한 혐의로 법정에 서게된것이다. 유죄가 인정될경우 그는 최고 10년의 징역형에 처해질수있다. 딸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위해 범인을 직접 납치한 아버지 밤베르스키, 프랑스인들은 무려 30년만에 범인에게 죗값을 치르게한 밤베르스키를 용감한 아버지라고 추앙하며 그의 무죄를 외치고 있다.